수요성경대학

이광은 목사 강의(2) 신구약 중간시대 (19.3.13)

제1강 신/구약 중간시대


중간시대란?
말라기 선지자 이후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400년 동안을 신/구약 중간시대라고 부른다. 이 기간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 어떤 계시도 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포로에서 귀환 유대민족들은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 세계 열강들에 의해 고난의 시간을 지내게 된다. 
 

중간시대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1) 신약성경에 나오는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2) 하나님 나라의 구속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짐을 알 수 있다.

 

< 중간시대 연대기>

 

다니엘서에 나타난 중간시대의 역사
다니엘서 2장, 7장에는 장차 유대민족과 세계 역사 가운데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예언하였다. 그리고 다니엘서에

기록된 이 모든 것들은 세계사 속에서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1) 다니엘 2장에 나타난 느부갓네살의 꿈(느부갓네살 2년, BC 603년, 다니엘 포로2년)

순금 머리(2:36-38)

바벨론 제국(BC 605-539)

은 가슴과 두 팔(2:39)

메데/바사 제국(-BC 333)

놋 배와 넓적다리(2:39)

헬라 제국(-BC 63)

쇠 종아리(2;40)

로마 제국(-AD 476)

철과 진흙 발(2:41)

로마제국의 분열

뜨인 돌(2:41)

영원한 하나님 나라


2) 다니엘 7장에 나타난 다니엘의 꿈(벨사살 원년, BC 549)

사자(7:4)

바벨론 제국

곰(7:5)

메데/바사 제국

표범(7:6)

헬라 제국

쇠 이빨과 열 뿔 가진 짐승(7:7-20)

로마 제국


* 바벨론 제국
1) 느부갓네살과 갈그미스 전투
BC 609-606년 어간에 유프라테스 강을 사이에 두고 이집트-앗수르 연합군과 바벨론 사이의 전투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앗수르를 패망시키고, 이집트에 대해서도 큰 승리를 이끈다.

 

2) 예루살렘 1차 침공과 다니엘과 세친구들(BC 605 8월)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루살렘을 포위 항복을 요구하였고, 이에 유다왕 여호야김은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BC 605에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살이 사망하자 왕권 장악을 위해 급히 바벨론으로 돌아가면서 유대인 귀족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이 때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에 잡혀간다.

 

3) 예루살렘 2차 침공(BC 597)과 2차 포로(에스겔 포함)
여호야긴이 왕이 된 후 유대 내에 친 애굽주의자들의 득세로 바벨론에 반기를 들자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한다. 이 일로 여호야긴은 왕후와 왕자들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느부갓네살에게 나아가 용서를 빌었으나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잡아가고 이때 에스겔을 포함한 1만 명 이상의 포로가 잡혀간다.

 

4) 예루살렘 3차 침공(BC 588)과 3차 포로(BC 586)
시드기야가 왕이 된 후 몇 년동안 친바벨론 정책을 폈으나 통치 9년부터 친이집트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바벨론에 저항하였다. 이에 대해 느부갓네살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2년동안 포위하였으나 시드기야가 저항하자 BC 586년 7월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전과 왕궁과 귀족들의 집을 불태우고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전 기물들을 다 뺏어갔다.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에 잡혀가 감옥생활 중 사망하였다.

 

5) 바벨론의 패망
느부갓네살 이후 바벨론은 급속히 침체기를 접어들게 되고, BC 539년에 나보니두스왕(벨사살이 섭정) 때 고레스는 바벨론에 입성하게 된다.

 

* 바벨론 제국시대의 유대민족

1) 유다 땅에 남은 사람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그달리야를 유다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해서 유다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바벨론의 관리들은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려고 애섰지만, 전체적으로 상황은 매우 비참했다. 예레미야 애가는 당시 유다 땅에 남았던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다.
그달리야는 bc 582년에 군대장관 이스마엘에 의해 암살당하고,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한 유대 지휘관들은 이집트로 피신했으며, 이때 예레미야도 이들에 의해 이집트로 끌려 내려갔다.

 

2) 바벨론에 잡혀간 유대 공동체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체로 유다에 남아있던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 바벨론은 잡아온 포로들을 그발강을 따라서 바벨론과 니푸르 근처의 마음과 도시에 정착시켰다. 포로들은 자신들의 정착지역을 가리켜 ‘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버려진 땅을 의미한다(바벨론 사람들이 포로들에게 버려진 땅을 주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포로들의 신변 안전은 만족스러운 편이었으며 생활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3) 이집트로 내려간 유대 공동체
이집트는 다른 유다 피난민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유다로부터 예레미야를 데리고 나와 정착한 무리는 이집트에서 성소를 세우고 새로운 삶을 꾸리고자 했다. 그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살면서 여호와와 다른 신들을 혼합시키기도 했지만 그들은 신전을 세우고 철저한 의식과 절기 제도를 지켜 나갔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에 정착한 유대 공동체는 후에 기독교 전파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디아스포라의 전조가 되었다.


* 페르시아(바사) 제국

1) 페르시아의 발흥과 고레스 대왕
고레스는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1세와 메대 왕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고레스는 페르시아와 메대의 두 왕실이 결합해서 탄생한 사람이었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메대왕국과 리디아 왕국을 점령한 후 bc539년에 바벨론을 점령하였다.

 

2) 다리오 1세(학개,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의 죽음으로 생긴 혼란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른 후 bc490년에 그리스를 침공하지만 마라톤 전쟁에서 패배한다. 

 

3) 크세르크세스 1세(에스더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
다리오 1세의 아들로 이집트와 바벨론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살라미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패전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bc465년 궁정 쿠데타로 살해당했다.

 

4) 아닥사스다 1세(느헤미야가 술관원으로 있었음, 아닥사스다 1세 통치 7년에 에스라에게 사명이 주어짐)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세력범위를 한정하는 칼리아스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그리스와의 전쟁을 종식했다.

 

5) 다리오 3세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침공함, 다리오 3세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레산더 대왕에게 패배한 후 자신의 수하에게 살해 당했다.

 

*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포로들

귀환순서

1차귀환

2차귀환

3차귀환

연대

BC 537

BC 458

BC444

인도자

스룹바벨, 예수아

에스라

느헤미야

바사왕

고레스

아닥사스다 1세

아닥사스다 2세

관련사건

성전재건

영적 개혁운동

성벽중건,

에스라 율법선포

참고성경

스1-4:6, 4:24-6:22

스7:1-10:44

 

 

 

* 헬라제국과 유대민족

1)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전쟁
알렉산더는 20세에 마케도니아 왕이 되었다. bc 334년 알렉산더는 그라니쿠스 강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무찌르고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bc333년에 잇수스 전투에서 다리오 3세와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bc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를 완전히 패퇴시켰고, 다리오 3세는 자신의 수하에 의해 살해당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주요도시를 점령함으로써 페르시아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그 외에도 이집트,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 골짜기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오랜 원정으로 인한 과로로 33세(bc323년)에 바벨론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2) 알렉산더 제국의 분열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프톨레미, 안티고누스, 데메트리오스, 셀류코스가 제국을 분활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프톨레미와 셀류코스가 안티고누스와 데메트리오스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 헬라제국의 패권은 프톨레미와 셀류코스가 차지하에 된다.

프톨레미

이집트 지역을 중심으로 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

셀류코스

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지역

 

이후 셀류코스가 입수스 전투로 얻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요구함으로 두 세력의 대립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100년동안(bc200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두 세력간의 전쟁은 다섯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마침내 셀류코스 왕조가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3) 프톨레미 왕조 통치 하의 유대 민족
알렉산드리아는 프톨레미 왕조의 수도로서 그리스문화와 교역의 중심지로서 무한한 경제적 잠재성을 지닌 도시였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혹은 해상무역을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한 유대사람들은 그리스어를 비롯해 헬레니즘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고, 이로인해 유대 사람 수는 증가했다. 이에따라 그때까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만 되어 있던 성경의 그리스어 역본이 필요하게 되었다.

70인역이라고 알려진 그리스어 역본은 프톨레미 2세때 시작하여 오랜 세월을 거쳐 완성되게 되고, 이 역본은 이후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성경’이 되었다.

프톨레미 왕조 하에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은 종교와 행정 당국자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대제사장은 세금을 거두어 이집트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었는데 프톨레미 3세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2세가 조세의 의무를 거부하자 프톨레미 왕조는 헬라화된 문화에 익숙한 도비야 가문에 이 일을 맡겼다(도비야: 느헤미야의 대적 중 한사람).

팔레스타인의 주변 도시들이 헬라화되면서 유대사람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고, 유다의 전통 신앙과 헬레니즘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었다.

 

4) 셀류코스 왕조의 통치하의 유대민족
셀류코스 왕조는 bc223년 안티오코스 3세가 왕위에 오른 후 번영을 이루게 된다. 안티오코스 3세는 스스로 ‘대제’라 칭하며 제국을 통합하고 확장시켜 나갔다.

안티오코스 3세는 제5차 시리아 전쟁을 통해 남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유대사람들을 전통에 따라 살게 해주었으며, 세금을 경감해주고 전쟁으로 인해 손상된 예루살렘 성전의 복구를 지원했다. 초기 셀류코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정책은 매우 평화롭고 우호적이었다.

 

5) 셀류코스 왕조의 헬라화 정책
bc 190년경 안티오코스 3세는 당시 로마 통치 아래 있던 그리스로 세력을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 한니발 장군의 군대가 주둔해 있는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로마는 셀류코스 왕주에 막대한 돈을 요구하는 동시에 소아시에 대한 패권을 차지했다.

안태오코스 3세는 재정적인 위기에 몰리게 되고 로마가 요구하는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동부 지역의 신전들을 약탈하던 중 bc187년에 살해당했다.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중 셀류코스 4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bc175년에 암살을 당한다.

셀류코스 4세가 암살 당하자 로마에 인질로 잡혀있던 그의 동생 안티오코스 4세가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왕이 되었다. 열렬한 그리스 문화 옹호자였던 안티오코스 4세는 전통적인 헬라식 칭호인 ‘데오스 에피파네스’를 취한다.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의 왕국을 통합하기 위해 헬라화 정책을 적극 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의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의 동생 야손에게 대제사장직을 팔았다.

야손은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축제를 들여오고 운동경기를 개최하는 등 철저한 헬라주의자였다.

bc172년에는 대제사장 가문 출신도 아닌 메델라우스가 야손에게 더 많은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샀다. 이렇게 대제사장의 희생제사는 안티오코스 4세의 세입의 원천이 되었고, 전통적인 유대사회에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충성심을 다지고 이집트와의 경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유다의 전통을 압박하고 모든 유대 사람에게 그리스 풍습을 강요했다. 그는 할례예식과 안식일 규례를 금하는 칙령을 공포하는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 신을 섬기는 제단을 세웠다. 안티오코스 4세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유대사람들은 희생제물로 돼지를 사용해야 했고, 이교도 희생 제사를 참여해야 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아크라 라고 알려진 예루살렘의 복서쪽 요새에 셀류코스 군대를 주둔시키고 자신의 칙령을 잘 지켜지는 지를 감시했다. 그곳에서 셀류코스 군대는 왕의 명령에 따라 두 차례나 성전을 약탈했다.

 

6) 마카베오 혁명(맛다디아-유다 마카베오-요나단-시몬)
맛다디아라는 유대 제사장이 안티오코스 4세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희생제사를 거부하고, 그의 아들들(시몬, 요한, 유다, 엘르아살, 요나단)과 함께 왕의 대리자와 수하들을 살해하였다. 맛다디아는 그의 다섯아들과 고프나 산지로 고망가서 거기서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규합된 무장 저항 세력인 ‘하시딤’과 규합한다(※하시딤은 후에 등장하는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의 모체가 된다).

맛다디아가 죽자 그의 셋째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혁명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마카베오(망치질하는 자)라고 불리던 유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셀류코스 군사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이끈다.

bc164년 겨울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탈환하고 이교제단을 없앴으며 성전을 정화했다. 유다의 하누카(수전절) 축제는 바로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bc160년 유다가 죽자 그의 동생 요나단이 혁명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요나단은 대제사장직을 얻고 유다와 사마리아를 관할하는 실권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안티오코스 4세의 왕권을 탐하는 또 다른 셀류코스 장군 트리포에 의해 살해당했다.

요나단이 죽자 시몬이 요나단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시몬은 예루살렘의 아크라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셀류코스 군사들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유다는 bc586년 이후 처음으로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7) 하스몬 왕조(유다의 독립국가)
시몬과 그의 후손들은 bc63년 로마가 쳐들어올 때까지 약 80년간 유다 독립국가를 다스렸다. 이 기간을 가리켜 ‘하스몬 왕조’라고 부른다. 하스몬 왕조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당시 하스몬 왕들은 그리스식 경향이나 이방의 문화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대제사장 가문이 아니었음에도 대제사장이라 불렀기 때문에 바리새파와 같은 엄격한 유대 사람들과는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시몬이 죽자 그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가 대제사장 자리에 오르게 되고, 그는 사마리아 신전을 파괴하고, 이두매(에돔) 지역을 정복하고, 이두매 사람들에게 유대교를 수용하도록 강요하였다.
히르카누스가 통치한 30년 동안 유대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유대민족들은 헬라화되었고, 자녀들의 이름도 그리스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왕실은 그리스 문화로 변모해 갔다. 히르카누스의 장자 아리스토불로는 대제사장직에 오른 후 완벽한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감금하고 처음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아리스토불로가 죽자 그의 동생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그는 왕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아리스토불로의 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와 혼인하고, 유다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얀네우스는 자신을 견제하는 바리새파 사람 800명을 처형함으로 유대인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얀네우스가 죽자 미망인 살로메는 9년동안 유다지역을 다스리고, 그의 장남 히르카누스 2세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렸다.

살로메가 죽자 사두개파의 지원을 받고 있던 아리스토불로 2세가 형 히르카누스 2세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 때 이두매(에돔)의 장군 안티파테르가 자신이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호임을 파악해서 히르카누스 2세의 편에 서서 아리스토불로 2세를 몰아낸다.

bc64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시리아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협하게 된다. 이 때 양진영 모두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청원했는데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에 아리스토불로가 폼페이우스의 결정에 순응하지 않자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출정해 bc63년에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히르카누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웠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로마통치가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으나, 이두매 총독 안티파테르가 로마의 신뢰를 받는 비공식적인 통치자였다.

안티파테르는 그의 두아들 파사엘과 헤롯을 각각 예루살렘과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했다. 파사엘은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을 평온하게 통치했다. 그러나 헤롯은 갈릴리에서 히즈키야가 일으킨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폭군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bc43년에 안티파테르가 암살되자 안토니우스는 파사엘과 헤롯을 분봉왕으로 임명했다.
 

제목 날짜
수요성경대학 게시판입니다.    2019.03.21
이광은 목사 강의(9) 선지서의 맥(3) 이사야-말라기 2019.12.13
이광은 목사 강의(8) 선지서의 맥(1)(2)-12월4일 2019.12.06
이광은 목사 강의(7) 역사서의 맥(3) 역대기-에스더(11월27일) 2019.11.29
이광은 목사 강의(6) 역사서의 맥(2) 삼상-하,왕상,하(11월20일) 2019.11.22
이광은 목사 강의(5) 역사서의 맥(1)-2 사사기,룻기(11월13일) 2019.11.22
이광은 목사 강의(4) 역사서의 맥-1 여호수아서(10.30일/11.6일) 2019.11.02
이광은 목사 강의(3) 모세오경의 맥(10.23일) 2019.11.02
이광은 목사 강의(1)-2 한눈으로 보는 신구약성경(10.16일) 2019.10.18
이광은 목사 강의(1) 서론-성경은 어떤 책인가(10.16일) 2019.10.18
2019년 하반기 수요성경대학 학사일정(10.16일 개강) 2019.10.11
이광은목사 강의(7) 예수님의 공생애 3-4년차사역(19.4.24) 2019.04.25
이광은목사 강의(6) 예수님의 공생애 2년차사역(19.4.10/19.4.17) 2019.04.13
이광은 목사 강의(5) 예수님의 공생애 1년차 사역 (4월3일) 2019.04.06
이광은 목사 강의(4)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시절 (19.3.27) 2019.04.06
이광은 목사 강의(3) 로마제국과 신약성경의 배경 (19.3.20) 2019.04.06
이광은 목사 강의(2) 신구약 중간시대 (19.3.13) 2019.04.06
2019년도 전반기 수요성경대학 학사일정 2019.04.06